[이학영 칼럼] 소방관의 윤리, 대통령의 윤리

입력 2021-06-22 17:20   수정 2021-06-23 01:15

매년 9월 11일 아침, 미국 뉴욕에서는 특별한 마라톤대회가 열린다. 수만 명의 참가자가 배터리터널 입구에서 ‘그라운드 제로’(2001년 ‘9·11 테러’로 사라진 트레이드타워 터)까지 5㎞ 구간을 달린다. ‘9·11’ 당시 순직한 스티븐 실러 소방관을 추모하는 행사다. 사고 당일 비번이었던 그는 집에서 테러 소식을 들었다. 그에게는 휴무일이었지만,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소방장비를 챙겨 트레이드타워로 차를 몰았다. 배터리터널에서 통행이 차단되자 34㎏에 이르는 장비를 둘러메고 현장까지 5㎞를 달려갔다. 다섯 아이의 아버지였던 실러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고 현장 수습에 목숨을 바친 343명의 소방관 가운데 한 명이 됐다.

미국 사회는 실러를 비롯해 직무 수행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소방관의 헌신과 순직에 전율했고, 그들의 숭고한 뜻을 두고두고 기리기로 했다. 사고 이듬해인 2002년부터 ‘9·11 스티븐 실러 추모 마라톤대회’를 여는 이유다. 이 대회에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장 차림으로 매년 참가한다. 실러를 비롯한 순직 소방관들의 정신을 새기기 위해서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은 소방관과 경찰, 군인 등 제복 입은 공직자의 헌신에 특히 큰 의미를 부여한다. 공무수행 중 순직하면 고인과 유족에게 최고 수준의 예우를 다하고, 실러 소방관과 같은 사례를 적극 발굴해 전파한다. 이런 노력은 공직자들의 사명감을 높이는 동시에 국민 통합을 이끄는 효과로도 이어진다.

제복 입은 공직자들의 충혼(忠魂)에 관한 한 한국도 미국 못지않다. 시민의 안전과 평화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소방관과 경찰, 군인이 많다. 지난주 경기 이천 대형 물류센터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소방대장 김동식 소방령은 그런 공직자의 전형이다. 물류센터가 화재에 휩싸이자 맨 앞에서 후배 소방관들을 지휘하며 건물로 진입했고, 거센 불길로 인해 긴급 탈출 지시가 떨어지자 맨 뒤에서 팀원들을 챙기다가 본인만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작년 7월 13명의 사상자를 낸 용인 양지SLC물류센터 화재 현장에서도 구조활동을 펼쳤다. 어깨 수술을 받고 복귀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동료들이 만류했지만 “대원들만 내보낼 수 없다”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공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의 참뜻을 새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나라다움’을 떠받치는 토대이기도 하다. 공자는 세상이 바로 돌아가기 위한 이치로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를 꼽았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다우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와 그에 따르는 도리를 새기고 지킬 때 비로소 살 만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일깨움이었다.

독일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세상의 윤리를 책임윤리와 신념(심정)윤리, 두 가지로 구분하고 공직자에게 책임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그 행위가 순수한 심정에서 이뤄진다는 점에 가치를 두고 결과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신념윤리다. 공직자라면 자신의 행위가 예견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책임윤리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유럽 순방 중 스스로를 가리켜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높은 윤리의식을 지켜왔다”고 한 말은 그런 점에서 짚어볼 여지가 많다. 수도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본인이 가톨릭 신자임을 언급하면서 한 말이지만, 국정 최종 책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렇다. 일부 언론은 문 대통령의 각종 권력남용 의혹과 자녀들의 석연치 않은 행보 등 ‘내로남불’ 논란을 들어 그의 발언을 비판했지만, 보다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게 있다. 그가 말한 ‘높은 윤리’가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책임윤리’가 아니라 ‘신념윤리’를 뜻한 게 아닌지 하는 문제다. ‘소득주도성장’과 탈(脫)원전을 비롯한 탁상 위의 좌파이념 정책을 마구잡이로 밀어붙여 경제와 에너지 등 주요 생태계를 파탄 냈다는 지적을 ‘높은 윤리의식’이란 말로 퉁겨낸 게 아닌지 궁금하고 걱정스럽다. 정말 그렇다면 절망적이다. 국정에 대해 최고·최후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여태껏 ‘신념윤리’만을 되뇌고 있다면 본인과 나라의 큰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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